마을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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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동리

고종 32년(1895)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우리, 산동리의 각 일부와 남내면의 장암리 일부와 부여군 천을면 내리의 일세촌을 병합하여 석우와 산동의 이름 따서 석동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장암면의 행정적 중심지가 되는 리다.

원문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원문이라고 하였는데 고종 32(19895)년 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산동리,석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원문리라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마을을 들어서는 산 양쪽을 깎아서 길을 내어 사람들을 드나들게 한 마을이라 그 문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타지방 사람들이 원문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원문이라고 부르게 된 마을이라 한다.

합곡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합하리,상곡리, 역리 일부와 홍산군 남면 마동리일부를 병합하여 합하(상곡 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합하)라고 부른다.
넓은 들을 끼고 있는 마을로 자연을 마음껏 음미하는 들을 아래로 두고 개구리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승지라 하여 합하라고 부른다)와 상곡(조선 영조36년 (1760) 풍양조씨 조정진. 조구진 두 형제에 의해 설촌되어 당시두 형제가 정자나무 3그루를 심어 1그루는 고사하고 2그루가 아직 남아 있어 마을 유래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상전을 일구어 양잠마을로 성장하였다 하여 상곡이라 불러왔다)의 이름을 따서 합곡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점상리

옛날에는 지금의 남면 및 구룡평야를 바라보는 산마루여서 선비 및 시인묵객이 한번쯤 찾아서 인 생을 회고하는 자리로 소문났으며 장안에서 대감들이 말하기를 구룡의 탁류와 청류를 보았는가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지금의 점상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쪽을 가리킬만큼 소문난 명소였었다 .본래 임천군 박곡면(박씨들이 처음 정착한 마을이라 박골, 박곡이라고 부른다)의 지역으로서 점말 위쪽이 되므로 윗점말, 상점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북박면 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경리, 구리곡리의 각 일부와 홍산군) 남면의 마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점상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됨.

지토리

본래 임천군 신리면의 지역인데,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성백면에 편입되었다 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장리( 옛날에 종이를 뜨는 공장이 있었다 해서 지장골, 지장, 지장리라고 부른다)와 토산리를 병합하여 지토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됨

하황리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누른다리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황다리 또는 하황교, 산과 들의 흙빛이 모두 누르다하여 누른드리, 누른다리, 황교, 황교리라고 부른다.
' 라 하였는데 고종 32년 (1895)에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하황리와 아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하황리라함.

상황리

상황리는 조선중엽에 풍양조씨가 하곡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전하며, 그후 임천군 남산면의 지성으로서 누루다리 또는 상황교를 줄여 상황리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하황리 일부를 통합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또한 상황은 왕림이라고도 하는데, 북쪽 오암산 아래 세 개의 큰 묘가 왕릉이라는 연유에서 불리어 지고 있다.

장하리

백제 멸망후 금강 건너에 있는 석성 파진산에서 나당군과 싸운 백제군의 부상병들이 금강을 건너 사랑산성에 은겅하였다가 둔병이 되어 백제부흥을 외치며 살던 지역이 장정지역이란 구전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백제의 부흥운동과 연곤이 되는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사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 진주강씨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풍양조씨의 정착으로 넓은 들의 개간과 함께 풍요로운 고장이 형성된 지역이다.
조선시대말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장정리, 후포리, 탑리, 하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정과 하곡의 이름을 따서 장하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북고리

후백제시대 최씨가 설촌(設村)하였다고 전하며, 현재 최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1600년경(年頃) 남평문씨가 정착(定着)하고 1640년경 진주(晋州)강씨가 장하리 이주(移住)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북고리는 본래 임천군(林川郡) 내동면(內洞面)의 지성으로서 북구천리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 지방관제(地方官制) 개정에 의하여 남내면에 개입되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북고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개입되었다.
건너말(일명 越村)과 강령(江嶺) 요당(일명 노동)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정암리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오는 금강의 물줄기가 장암면 북쪽에서 금천과 합류하고는 동쪽으로 물줄기를 바꾸는 그 아래쪽에 위치해서 마당바위와 산과 들로 아름다운 운치를 자랑하는 지역에 정암리는 자리한다.
장암면의 호칭이 정암리에 떠 있는 마당바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바위는 면명으로 지적이 될 만큼 또한 유서깊은 바위다 .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고종(高宗) 32년(1895)에남내면(南內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정자리(亭子里), 수작리(樹作里), 장암리(場岩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자와 장암의 이름을 따서 정암리라 함